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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jinbo.net/kimpoo88/66 에서 퍼온 글



출교조치 그 이상을 요구하며

학내 여론은 성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의 출교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출교는, 그 형평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하나의 징계입니다. 출교조치가 가해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 아니냐는 일련의 반응은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집단성폭력은 한편으로는 형사범죄일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의 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사회구성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특히 이번 경우 여성 학생들이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1).

출교조치 요구는 집단성폭력이 ‘잘못된 행동’임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러나 출교조치 요구가, 고려대학교 학생사회가 여성 학생들을 배제하고 있고, 여성 학생들을 남성 학생들과 대등한 개인이자 주체로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때, 우리는 출교조치를 통해 이번 사태를 망각하려는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의 시도를 단호하게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는 이번 집단 성폭력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사태가 언론에 공개된 직후, 고파스(www.koreapas.net) 등지에 올라온 글들은, 아예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고려대학교’와 분리시키려 했고, 이 사태를 ‘고려대학교’와는 무관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처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 ‘자체’에 관해 많은 학생들은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분노에 가득 차 가해자들이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여태까지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보다는 피해자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명예를 더럽힌 소위 문란한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온정적인 시선을 받지 못했습니다. 법조계는 1990년대 이래 이런 인식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그리고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런 인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했다시피 학생사회가 분노한 것은 가해자들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성폭력이 피해자 가족이나 고려대학교 명예를 더럽힌다는 인식이야말로 성폭력 주범은 아닐까요? 성폭력을 사회 명예 문제로만 보고 거기서 피해자 여성을 배제시키는 것이야말로, 여성이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도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번 집단성폭력이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사태가 아니라, 남성들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태이자 여성을 배제하는 고려대학교 학생사회 현실을 폭로하는 사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출교조치가 행해지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를 ‘징계’한다는 의미만을 지니며, 그러한 징계가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방점은 언제나 징계 이후에, 혹은 징계와 무관한 이 학생사회의 변화 그 자체에 찍혀야 합니다.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성폭력은 고파스 익명게시판에서, 결코 여성 교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떤 남성 교수 발언에서, 남성 학생에게는 편하기만 할 술자리들에서, 어떤 여성 학생 자취방에서 끊임없이 벌어져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폭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성폭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고려대학교 남성 학생들은, 여성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여성을 음식물에 비유하고 여성을 ‘더 나은 자위도구’로만 보는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학생사회에 기입함으로써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와 여성-남성 관계를 전화시키려 할 때, 남성 학생은 그들의 행위에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적 위치에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석순    /    법과대학 김푸른솔

1) 물론 여성 학생들도 형식적으로는 학생사회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 자체가, 그 형식적 포함이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thehole


얼마전에 몇몇 친구들과 놀다가, 공동체 기반의 혹은 이웃 기반의 노동조합에 관해 읽은 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Michael D. Yates가 그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아니라 Leo Panitch가 얼마전에 한 인터뷰("Rebuilding the Left in a Time of Crisis")에서 한 얘기였다. 그게 기억이 나 이 부분만 옮겨 놓는다. 뭐, 대단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꽤나 중요하게 다가온 부분이다. 과거를 낭만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건 저런 과거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와 비교할 때 오늘이 더욱더 서글프게 다가온다.

번역은 못하겠다...



http://www.newleftproject.org/index.php/site/article_comments/rebuilding_the_left_in_a_time_of_crisis


Edward Lewis What do you think has changed that means that community-based, neighbourhood-based, organizing is also necessary now – or was it always also necessary?

Leo Panitch It was always necessary. And I think one of the reasons that we suffered some such defeats was that the working-classes became bereft of what had originally been a large element in the formation of trade unionism to begin with, as welfare state benefits replaced the kind of community benefits that trade unions had originally provided. When trade unions emerged, before the welfare state, they often were playing the role of providing for the community a central space of meeting, a guarantee of a funeral benefit, a guarantee of a social benefit etc. And in that sense, trade unionism was a community trade unionism. And increasingly, ironically, one of the contradictions of the welfare state was that the things that trade unions had done were now taken over by the state. And union people lost those capacities. My Dad learned Robert's Rules of Order through his local union branch and benefit society, where workers had to run their own meetings. Incidentally, I have increasingly found that people that I was teaching at first year university, and sometimes fourth-year university, knew less about running a meeting, knew less about politics, than my Dad with a grade 5 education. He'd gotten his knowledge out of the community-based nature of the labour movement.

So what had been there was lost. I may be romanticizing how much it had been there but I think it had been there to a significant extent. Of course it was the way capitalism developed that mainly destroyed it – workers tended to live together, much more than they do now, in working-class communities. With the automobile, with the transformations of suburbanization, workers got dispersed much more throughout the modern city.

So it isn't going to be easy to rebuild this community trade unionism, but I think it needs to be done, it needs to be on our agenda, and I think there are increasing grounds for us to think that that is possible.







Posted by thehole



그제 퇴근해 집에 돌아온 뒤 박가분님이 자신의 글에 또 하나의 글을 올려 놓은 걸 봤다(여기). 슈리님 글 문제와 관련된 이전의 박가분님 글 두 편도 아직 제대로 못 본 상황이라. 제대로 말하기는 힘든데, 쓱 넘겨 봤을 땐 이해가 안 되는 부분 투성이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슈리님의 최근 글을 보고, 이 사람과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처음엔 안 그랬냐만은, 이런 식의 대응을 보면서 경멸감이 말할 수 없이 더 커졌다고 할까. 그리고 나름 계속해서 논평을 하고 있는 박가분님이 (그가 슈리님과 친분이 있냐 없냐를 떠나) 슈리님의 이런 태도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희한한 말들을 해대는 걸 보고, 이 분도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다(물론 박가분님의 글 자체 역시 문제이다).

한 친구는 나에게 왜 이리 쓸데없는 일을 하냐고 질타했다. 그 말에 동의하고 그들과 더 이상 별 말 안 섞고 싶지만, 그냥 여기서 접기엔 아쉬운 마음도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몇몇 사안들에 관해서는 좀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만약 이 일과 관련해 무언가 말을 할 일이 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무튼 그날 박가분님 글을 보고, 몇 글자 적었다가 다듬을 시간이 없어 일단 올리지는 않고 있었다(친구 몇 명에게 보여주긴 했다). 그런데 계속 시간이 안 날 듯하고, 또 그렇다고 (잘 쓰거나 매우 중요한 논점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놔두기도 그래서 몇 부분만 수정해 올린다. 참고로 박가분님은 자신의 블로그 글에 트랙백을 걸지 못하게 해놨다. 여담으로 한 마디 하고 지나치자면, 참 지저분하다.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박가분님의 최근 글에서 마음에 안 들었던, 그리고 내가 보기엔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한다(답변은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박가분님이 계속 딴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보단 끼워맞추기 편한 자료들을 갖고와 억지로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한다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논쟁 조건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나의 불만은 다음과 같다. 물론 그의 그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만이 아닐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지적한 부분들은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드러나는 문제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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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박가분님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일종의 관심법을 쓴다고 하면서 글을 길게 쓰고 있는데(원래 이 글 제목은 "관심법~~"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누가 어떤 비판을 어떻게' 박가분님에게 가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선 박가분님이 그 누군가에게 반비판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이를테면 그 비판자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나 하고 반비판하고 있는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어떤 전략을 갖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황당하다(그리고 내가 보기엔 박가분님의 이 글은 애초 문제가 되었던 슈리님 글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 부분은 박가분님의 다른 글들을 꼼꼼히 읽지 못한 관계로 아쉽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그 다음으로, 박가분님은 자신의 주장의 전거로 윤소영 교수의 글을 끌어오는데, 윤소영 교수의 글을 인용한 다음,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윤형님이 어느 글에서 '맑스주의적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겐 맑스주의 논의가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라고(대충 설명하면 이렇다) 말한 것처럼, 나는 윤소영 교수의 최근 글들이 맑스주의적 전제를 공유하는 나에게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앞에서(혹은 나뿐 아니라 다른 그 누구 앞에서라도) 윤소영 교수의 글을 갖고오려면, 단순히 윤소영 교수의 글을 하나의 '권위'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윤소영 교수가 어떤 말을 했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자신의 주장과 비슷하며, 그리고 그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정당한 절차 아닌가? 아니, '기본' 아닌가?


또한 박가분님은 자꾸 공무원, 교수, CEO를 유비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박가분님에게 비판을 퍼부은, 그리고 박가분님이 이 글에서 반비판하는 그 누군가가 CEO도 노동자라고 말한 것인가? 물론 그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했을 수도 있다(아닌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역시나 그 누군가가 누구이고 어떤 비판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이게 뭔가? 논쟁인가? 박가분님은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고 있는 건가?


또 하나. 나는 박가분님의 글을 읽으면서 인용문들이 대부분 핀트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인용은 역시나 윤소영 교수의 글이다.

나아가 '사회의 보편적 지식'으로서 과학이 직접적 생산력으로 변형되면서 집단노동자가 변모합니다. 즉 '과학-기술혁명'으로 인해 집단노동자의 구성이 변화한다는 것이에요. 숙련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분할이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분할로 대체되거든요. 지식노동자는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구성되는데, 전자는 과학기술혁명을 담지하는 노동자인 반면 후자는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이지요. 따라서 후자는 빼고 전자만이 집합노동자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해요. 기술-관리직으로서 지식 노동자와 구별하여 생산직이라고 불리는 육체노동자는 숙련노동자나 비숙련노동자가 아니라 반숙련노동자이지요.(중략)
물론 지식노동자도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직은 아니더라도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지식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지식노동자가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이 될 때 특히 코퍼라티즘이 출현하지요.(중략)

윤소영 교수의 책을 읽지 않아, 정확히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다. 이게 맞는지 틀린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 부분에서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1) 과학기술 혁명으로 집단노동자의 구성이 변한다. 즉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분할이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분할로 바뀐다.
2) 지식노동자는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구성된다.
3) 기술직 노동자는 과학기술혁명을 담지하는 노동자이며, 반대로 관리직 노동자는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이다.
4) 따라서 관리직 노동자는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하지 않으며, 기술직 노동자는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한다.

이 부분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윤소영 교수는 육체노동자도 '집단/집합노동자'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집합노동자=육체노동자+지식노동자 중 기술직"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글을 토대로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기술직은 아니더라도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 동의하면서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말을 이렇게 바꾼다.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는데(사실 한 가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선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해당 부분에서 "기술직은 아니더라도"를 슬쩍 뺐다. 그리고 "공무원=관리직"이라는 등식을 내세운다. 그런데 윤소영 교수의 구분에 따르고 싶다면, 공무원도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나뉜다고 말해야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 둘째, 박가분님은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윤소영 교수의 규정에 기초해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윤소영 교수는 관리직을 두고 '노동자'라고 말하긴 한다. 왜 은근슬쩍 그 부분을 '신분'으로 바꾸는지?). 공무원이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한다는 건, 그냥 그렇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가의 '관리'와 국가의 '관리'가 과연 같은 의미인가? 좋게 말해 '국가'가 하나의 자본가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산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관리직'인가? 윤소영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국가(기구)에도 '기술직'과 '관리직'이 있고 그중 '기술직'은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물론 나는 윤소영 교수의 '집합(집단)노동자'라는 개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눈에 밟히는 표현들 몇 가지만 걸고 넘어지기로 하겠다.

1) 박가분님은 "나는 더더욱 정치경제학의 분석이 요청된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은데, 우선,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은 이미 예전부터 있어 왔고, 이 분야가 갈수록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만큼은 체계가 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박가분님의 글에서는 이런 연구들을 참고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다음으로, 하지만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 "더더욱 정치경제학의 분석이 요청"되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박가분님이 조만간 이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정치경제학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다. '분석의 필요성'만 외치지 말고 이제는 실제로 '분석 자체'를 좀 해줬으면 한다).

2) 박가분님은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판단/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지식노동자의 노동조합운동이 중심이 될 때 특히 코퍼라티즘이 출현하지요"라는 윤소영 교수의 글을 (약간 비틀어) 인용한 뒤, "실제로 공공부문의 노조가 유독 강한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노조운동이 가지는 한계"라는 표현을 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공공부문 노조운동'만이' 강성할 때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 한계는 다른 부문 노조운동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쟁점은 (슈리님의 구분법을 따른다고 가정할 때) 생산적/진정한/육체 노동부문의 노조운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박가분님은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강조는 내가 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이 표현은 사실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만이 강화되고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는 파괴되었을 때의 가능성과 한계"로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박가분님은 마치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 그 자체가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예컨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라고 말하는 듯하다(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진정한/육체 노동부문의 노조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근데 이게 과연 이해가 가는 말인가?

3) 이건 아주 당당하게 말하기는 힘든 부분인데(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명한 전거를 찾기가 귀찮아서...), 아무튼 슈리님이나 박가분님이나, 맑스 노동가치론이 '난해'하다고 말하면서(근데 나는 대체 뭐가 난해한지 모르겠다. 노동가치론이 '난해'한 게 아니라 현실이 '복잡'한 거 아닌가), 그걸 현실에 직접 대입해 분석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 이런 언급을 읽으며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는 건, 애초에 매우 단순하고 위험하게 맑스 노동가치론을 해석·적용했던 것이 이 두 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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