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퇴근해 집에 돌아온 뒤 박가분님이 자신의 글에 또 하나의 글을 올려 놓은 걸 봤다(여기). 슈리님 글 문제와 관련된 이전의 박가분님 글 두 편도 아직 제대로 못 본 상황이라. 제대로 말하기는 힘든데, 쓱 넘겨 봤을 땐 이해가 안 되는 부분 투성이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슈리님의 최근 글을 보고, 이 사람과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처음엔 안 그랬냐만은, 이런 식의 대응을 보면서 경멸감이 말할 수 없이 더 커졌다고 할까. 그리고 나름 계속해서 논평을 하고 있는 박가분님이 (그가 슈리님과 친분이 있냐 없냐를 떠나) 슈리님의 이런 태도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희한한 말들을 해대는 걸 보고, 이 분도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다(물론 박가분님의 글 자체 역시 문제이다).
한 친구는 나에게 왜 이리 쓸데없는 일을 하냐고 질타했다. 그 말에 동의하고 그들과 더 이상 별 말 안 섞고 싶지만, 그냥 여기서 접기엔 아쉬운 마음도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몇몇 사안들에 관해서는 좀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만약 이 일과 관련해 무언가 말을 할 일이 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무튼 그날 박가분님 글을 보고, 몇 글자 적었다가 다듬을 시간이 없어 일단 올리지는 않고 있었다(친구 몇 명에게 보여주긴 했다). 그런데 계속 시간이 안 날 듯하고, 또 그렇다고 (잘 쓰거나 매우 중요한 논점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놔두기도 그래서 몇 부분만 수정해 올린다. 참고로 박가분님은 자신의 블로그 글에 트랙백을 걸지 못하게 해놨다. 여담으로 한 마디 하고 지나치자면, 참 지저분하다. 아무튼 이 글에서 나는 박가분님의 최근 글에서 마음에 안 들었던, 그리고 내가 보기엔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한다(답변은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박가분님이 계속 딴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보단 끼워맞추기 편한 자료들을 갖고와 억지로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한다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논쟁 조건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나의 불만은 다음과 같다. 물론 그의 그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만이 아닐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지적한 부분들은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드러나는 문제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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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박가분님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일종의 관심법을 쓴다고 하면서 글을 길게 쓰고 있는데(원래 이 글 제목은 "관심법~~"였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누가 어떤 비판을 어떻게' 박가분님에게 가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선 박가분님이 그 누군가에게 반비판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이를테면 그 비판자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나 하고 반비판하고 있는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어떤 전략을 갖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황당하다(그리고 내가 보기엔 박가분님의 이 글은 애초 문제가 되었던 슈리님 글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 부분은 박가분님의 다른 글들을 꼼꼼히 읽지 못한 관계로 아쉽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그 다음으로, 박가분님은 자신의 주장의 전거로 윤소영 교수의 글을 끌어오는데, 윤소영 교수의 글을 인용한 다음,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윤형님이 어느 글에서 '맑스주의적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겐 맑스주의 논의가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라고(대충 설명하면 이렇다) 말한 것처럼, 나는 윤소영 교수의 최근 글들이 맑스주의적 전제를 공유하는 나에게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앞에서(혹은 나뿐 아니라 다른 그 누구 앞에서라도) 윤소영 교수의 글을 갖고오려면, 단순히 윤소영 교수의 글을 하나의 '권위'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윤소영 교수가 어떤 말을 했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자신의 주장과 비슷하며, 그리고 그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정당한 절차 아닌가? 아니, '기본' 아닌가?
또한 박가분님은 자꾸 공무원, 교수, CEO를 유비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박가분님에게 비판을 퍼부은, 그리고 박가분님이 이 글에서 반비판하는 그 누군가가 CEO도 노동자라고 말한 것인가? 물론 그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했을 수도 있다(아닌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역시나 그 누군가가 누구이고 어떤 비판을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이게 뭔가? 논쟁인가? 박가분님은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고 있는 건가?
또 하나. 나는 박가분님의 글을 읽으면서 인용문들이 대부분 핀트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인용은 역시나 윤소영 교수의 글이다.
나아가 '사회의 보편적 지식'으로서 과학이 직접적 생산력으로 변형되면서 집단노동자가 변모합니다. 즉 '과학-기술혁명'으로 인해 집단노동자의 구성이 변화한다는 것이에요. 숙련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분할이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분할로 대체되거든요. 지식노동자는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구성되는데, 전자는 과학기술혁명을 담지하는 노동자인 반면 후자는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이지요. 따라서 후자는 빼고 전자만이 집합노동자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해요. 기술-관리직으로서 지식 노동자와 구별하여 생산직이라고 불리는 육체노동자는 숙련노동자나 비숙련노동자가 아니라 반숙련노동자이지요.(중략)
물론 지식노동자도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직은 아니더라도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지식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지식노동자가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이 될 때 특히 코퍼라티즘이 출현하지요.(중략)
윤소영 교수의 책을 읽지 않아, 정확히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다. 이게 맞는지 틀린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 부분에서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1) 과학기술 혁명으로 집단노동자의 구성이 변한다. 즉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분할이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분할로 바뀐다.
2) 지식노동자는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구성된다.
3) 기술직 노동자는 과학기술혁명을 담지하는 노동자이며, 반대로 관리직 노동자는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이다.
4) 따라서 관리직 노동자는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하지 않으며, 기술직 노동자는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한다.
이 부분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윤소영 교수는 육체노동자도 '집단/집합노동자'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집합노동자=육체노동자+지식노동자 중 기술직"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글을 토대로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기술직은 아니더라도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 동의하면서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말을 이렇게 바꾼다.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는데(사실 한 가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선 박가분님은 윤소영 교수의 해당 부분에서 "기술직은 아니더라도"를 슬쩍 뺐다. 그리고 "공무원=관리직"이라는 등식을 내세운다. 그런데 윤소영 교수의 구분에 따르고 싶다면, 공무원도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나뉜다고 말해야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 둘째, 박가분님은 "관리직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노동자"라는 윤소영 교수의 규정에 기초해 "공무원은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하는 신분"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윤소영 교수는 관리직을 두고 '노동자'라고 말하긴 한다. 왜 은근슬쩍 그 부분을 '신분'으로 바꾸는지?). 공무원이 "노동/화폐의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대행"한다는 건, 그냥 그렇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가의 '관리'와 국가의 '관리'가 과연 같은 의미인가? 좋게 말해 '국가'가 하나의 자본가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산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관리직'인가? 윤소영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국가(기구)에도 '기술직'과 '관리직'이 있고 그중 '기술직'은 '집합(집단)노동자'를 구성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물론 나는 윤소영 교수의 '집합(집단)노동자'라는 개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눈에 밟히는 표현들 몇 가지만 걸고 넘어지기로 하겠다.
1) 박가분님은 "나는 더더욱 정치경제학의 분석이 요청된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은데, 우선,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은 이미 예전부터 있어 왔고, 이 분야가 갈수록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만큼은 체계가 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박가분님의 글에서는 이런 연구들을 참고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다음으로, 하지만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 "더더욱 정치경제학의 분석이 요청"되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구체적인 포섭과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박가분님이 조만간 이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무언가를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정치경제학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다. '분석의 필요성'만 외치지 말고 이제는 실제로 '분석 자체'를 좀 해줬으면 한다).
2) 박가분님은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판단/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지식노동자의 노동조합운동이 중심이 될 때 특히 코퍼라티즘이 출현하지요"라는 윤소영 교수의 글을 (약간 비틀어) 인용한 뒤, "실제로 공공부문의 노조가 유독 강한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노조운동이 가지는 한계"라는 표현을 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공공부문 노조운동'만이' 강성할 때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 한계는 다른 부문 노조운동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쟁점은 (슈리님의 구분법을 따른다고 가정할 때) 생산적/진정한/육체 노동부문의 노조운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박가분님은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강조는 내가 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이 표현은 사실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만이 강화되고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는 파괴되었을 때의 가능성과 한계"로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박가분님은 마치 "어떤 유형의 노동자들의 조직화" 그 자체가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예컨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라고 말하는 듯하다(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진정한/육체 노동부문의 노조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근데 이게 과연 이해가 가는 말인가?
3) 이건 아주 당당하게 말하기는 힘든 부분인데(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명한 전거를 찾기가 귀찮아서...), 아무튼 슈리님이나 박가분님이나, 맑스 노동가치론이 '난해'하다고 말하면서(근데 나는 대체 뭐가 난해한지 모르겠다. 노동가치론이 '난해'한 게 아니라 현실이 '복잡'한 거 아닌가), 그걸 현실에 직접 대입해 분석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 이런 언급을 읽으며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는 건, 애초에 매우 단순하고 위험하게 맑스 노동가치론을 해석·적용했던 것이 이 두 분이었기 때문이다.